이카루스의 리뷰토피아

<해무> 속 전진호는 왜 비극을 잉태했을까?

영화 이야기
반응형

 

리더십의 관점으로 본 <해무>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어선 한 척.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선장은 절대적인 권한(혹은 권력)을 갖는다. 그에 따르는 책임 역시 막중하다. 선장의 말 한마디에, 그리고 결정 하나에 배의 운명이 결정되고 선원들의 생사가 갈리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선장의 리더십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이 배에서는 내가 대통령이고 판사고 니들 아버지야!” 영화 <해무> 속 선장 철주(김윤석 분)는 선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남다른 선장이다.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칭하는 모습에서는 제왕적 리더의 모습이 느껴지지만, 그만큼 모든 걸 책임지겠다는 결의가 엿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철주는 감척 대상으로 분류될 만큼 낡은 전진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선원들의 밥줄을 지켜주고자 애를 쓴다. 그가 밀항의 조력자로 나서게 된 이유 역시 선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책임감의 무게 때문임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휘두르는 선장의 권력이 누구에게도 견제 받지 않는다는 데 있다. 전진호에 오른 완호(문성근 분), 호영(김상호 분), 경구(유승목 분), 창욱(이희준 분), 동식(박유천 분)은 모두 선장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것을 뱃사람의 덕목이라 생각한다. 실제로도 그렇게 행동한다. 전진호 안에서만큼은 철주의 말이 곧 법이요 진리다.

 

물론, 철주의 제왕적 리더십이 옳은 방향으로 쓰일 땐 아무 문제가 없다. 가령 영화 초반 뱃일에 서툰 동식(박유천 분)이 그물에 발이 끼어 기계 속으로 빨려들어 갈 때, 그를 구한 건 다름 아닌 철주의 냉정한 판단력이다. 다른 선원들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를 때, 철주는 과감히 기계를 부수는 결정을 내린다. 철주의 과감하고 빠른 판단력 덕분에 동식은 다리를 잃을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전진호 안에는 정과 의리가 넘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철주 역시 한명의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선장이라는 직위를 떼어놓고 보면 그 역시 IMF 여파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보통의 가장과 다를 바가 없다. 돈을 향한 세속적 욕망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 그는 법을 어기면서까지 밀항자를 실어 나르는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만다.

 

걸리면 모두 감옥행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머지 선원들 역시 선장의 판단에 침묵으로 동의한다. 왜냐하면, 뱃사람은 선장의 말에 따르는 것이 덕목이니까. 그리고 그들 역시 누구보다 돈이 필요했으므로.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리더의 잘못된 판단에 누구도 제동을 걸지 못했고, 한 배를 탄 ‘운명 공동체’라는 허울 아래 계속해서 그릇된 행동을 이어나갔기 때문이다.

 

철주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전진호의 '질서‘는 밀항자들이 배에 오르면서 서서히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전진호 입장에서는 ‘이방인’인 밀항자들이 전진호의 규칙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다. 전진호의 선장인 철주는 폭력을 동원하여 이를 일시 봉합하지만, 이로써 철주의 리더십은 이제 책임의 리더십과 제왕적 리더십을 거쳐 폭력의 리더십으로 폭주하고 만다. 더 나아가 철주는 선원들끼리 묻어둔 전진호의 비밀을 폭로할까 두려워 기관장인 완호를 살해하기에 이르고, 이를 목격한 동식은 더 이상 철주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신뢰를 잃은 리더는 더 이상 힘을 쓸 수 없다.

 

 

 

철주의 리더십이 무너지자 전진호는 광기의 장으로 변하고 만다. 나머지 선원들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고, 전진호에서는 아무런 규칙과 질서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오로지 욕망에 눈이 먼 자들, 그리고 살려고 몸부림 치는 나약한 인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과정의 중심에는 밀항자 가운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홍매(박예리 분)가 존재하지만, 전진호가 비극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철주에게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든 선원들을 지키려던 책임의 리더십이 끝내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과 광기의 리더십으로 변질되면서 결국은 동식의 저항에 부딪혔고, 그 연쇄작용이 전진호의 침몰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물론, 전진호의 비극을 모두 철주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나머지 선원들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은 너무나 고분고분했다. 쉽게 믿었고, 의심 없이 따랐다. 완호와 동식이 문제를 제기했을 땐, 너무 늦어버렸다.

 

한 사람의 리더십에만 의지하는 ‘질서’가 얼마나 허무한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그리고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어떤 식으로 변질되어 가는지, 영화 <해무>는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영화 스틸컷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하였으며, 저작권은 제작사 해무에 있습니다.

글의 무단 도용 및 불펌을 금지합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