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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2012년 열등감에 관한 보고서

영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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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작임에는 틀림없다. 개봉 27일 만에 300만 관객을 불러 모았고, 멜로영화의 흥행 신기록을 써나가는 중이다. 관객들의 평도 좋다. “한 편의 영화가 사랑받을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편리한 방법은 관객 개인의 기억 안에서 사유화되는 것”이라고 밝힌 허지웅(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대중은 <건축학개론>에서 자신들의 ‘첫사랑’을 떠올리며 영화와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된다. 심지어 몇몇 이들은 영화가 내 이야기인지, 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진 것인지 구분이 안된다고 한다. <건축학개론> 비판을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이유다.

 

<건축학개론>은 ‘첫사랑’과 ‘90년대 문화’ 라는 두 가지 키워드가 핵심이다. 영화를 둘러싼 평가와 리뷰에 유독 ‘추억’과 ‘향수’라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건축학개론>을 수작으로 꼽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승민이라는 캐릭터가 자신의 첫사랑을 포기하는 대목에서 시작된다.

 

 

 

 

잠깐 영화 속 이야기를 하자면, 승민이 서연을 포기하게 된 이유는 서연이 술에 취해 선배와 함께 자취방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선배는 평소 서연이 동경하던 강남에 살고 있다. 펜티엄 컴퓨터를 소유하고 자동차를 몰고 다니는 선배에 비하면 승민 자신은 짝퉁 티셔츠나 입고 다니는 한없이 ‘찌질한’ 남자에 불과하다.

 

이를 강북과 강남으로 구분지어지는 계급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해석도 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이 대목에서 나타나는 승민의 근본적인 감정은 ‘열등감’에 가깝다.

 

열등감이란 “자기를 남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을 뜻한다. 선배보다 가진 게 한없이 부족한 승민은 자신이 선배보다 못하거나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본인 스스로. 그 현실이 너무 견딜 수 없어 택시기사에게 시비를 걸고 맞고 또 맞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 승민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서연을 “썅년”으로 규정하는 것뿐이다. 자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서연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현실을 왜곡하면서 승민은 열등감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열등감도 아닐뿐더러, 현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첫사랑의 실패’라는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만 하나 안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시 영화 밖으로 나와 보자. 평소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이유모를 ‘열등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모르긴 몰라도 영화 속 승민이 느꼈던 그 열등감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승민이 느꼈던 무기력함과 열등감을 맛보기 때문이다.

 

가정이지만, 승민의 선배가 그저 잘생기고 말을 잘하는 혹은 매너가 좋고 노래를 잘하는, 그저 개인의 능력으로 인기를 얻는 캐릭터로만 그려졌더라면 이 영화가 전해주는 공감은 지금보다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그 상황에서도 승민 자신은 왜 자신은 멋지지 않을까, 노래를 못할까, 말을 잘 못할까 고민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허무하게 첫사랑을 떠나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어수룩하게 노래를 부르거나 촌티나게 자신을 꾸미는 모습이 에피소드로 엮이면서 서연과 더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승민의 첫사랑에 공감하는 남자들의 심리에는 단순하게 고백 한 번 못해보고 쩔쩔매던 그 시절의 기억뿐만 아니라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부모의 재력, 내가 선택한 게 아닌 내가 사는 곳, 그리고 나보다 가진 게 많은 친구나 선배에게 느꼈던 질투심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함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잔인한 이야기지만 2012년을 살아가는 지금도 문득문득 그 열등감을 마주하고 있기에 <건축학개론>에 더욱 공감하는 것이다.

 

 

 

 

계급 상승의 욕망을 이루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더 좋은 곳에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기억, 더 비싼 반지를 선물주지 못한 기억, 그리고 다른 집 아이들처럼 더 비싼 유치원이나 영어학원에 보내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때때로 1996년의 승민을 마주한다. 그럴때면 “세상이 좆같아서…”라고 외치지만, 결국 그것은 승민의 “썅년”발언과 다를 바가 없다. 열등감에서 벗어나려는 작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하든지 혹은 의식하지 않든지, 영화 속 ‘압서방’은 더욱 공고해졌다. 강남3구, 강남8학군, 외국어고, 특목고, 국제중, 서울대 등 이름만 달리하는 2012년 ‘압서방’은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그나마 1996년 서연은 비록 반지하 단칸방일지언정 ‘압서방’으로의 편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그 편입조차 쉽지 않다. 그렇게 우리의 열등감은 고착화돼왔다.

 

달라진 게 하나 있다면, 승민은 택시기사에게 맞으면서 그 터져 나오는 감정을 억눌렀다면 오늘날의 우리는 누군가에게 직간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감정을 해소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은 대부분 자기 자신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에 대한 보고서인 동시에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늘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다. <건축학개론>을 통해 무언가에 공감했다면, 이제는 우리 사회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나서야한다는 작은 주문이 가능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열등감을 이겨내는 길은 그것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서연을 끌고 방에 들어가는 선배에게 달려가 외쳐야한다. 선배 보다 가진 건 없고 부족하지만 서연을 많이 좋아한다고. 그리고 서연에게도 솔직하게 마음을 이야기해야 한다. “썅년”이 아니라 널 좋아한다고.

 

마찬가지로 언제까지 “세상이 좆같다”고만 떠들게 아니라, 당당하게 외쳐야 한다. 바꾸고 싶다고. 총선은 끝났지만 대선이 남았다. 더 이상의 ‘열등감’은 개나 줘버리고, 찌질한 승민이와는 안녕을 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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