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재벌 드라마’로 분류되는 이야기에는 몇 가지 정형화된 공식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이유 없이 여자 주인공에게 한 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여자 주인공의 집은 늘 가난하다는 설정 등이 그렇다. 또 하나 꼽아보자면, 도도한 표정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여주인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모님’을 빼놓을 수 없겠다.

재벌 드라마 속 사모님은 대개 ‘흰 봉투’를 미끼로 두 사람을 헤어지게 만들거나 이야기 속에서 오해와 갈등을 유발하는 불편한 존재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SBS 수목드라마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상속자들(이하 상속자들)> 속 사모님으로 등장하는 김성령은 이런 공식을 보기 좋게 무너뜨리며 오히려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다. 오히려 사모님이라 하기엔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허당기 넘치는 모습을 자주 선보이며 코믹캐릭터로 굳어지는 모습이다. 단언컨대, 지금껏 이런 사모님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제국그룹 사모님 한기애(김성령 분) 역시 처음에는 기존 재벌 드라마 속 사모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은상(박신해 분)에게 탄(이민호 분)과 가까이 지내지 말 것을 당부하며, 신분과 계급에 따른 차별을 당연시했다. 만약 탄이 은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기애 역시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자신의 아들인 탄이 정지숙(박준금 분)의 호적에 올라있고, 자신은 대외적으로 제국그룹의 사모님으로 나설 수 없는 첩의 입장이다 보니, 그녀는 기존 사모님과는 다른 모습을 종종 선보인다. 남편에게 “회장님”이란 호칭을 쓰는 대신 “오빠”라고 부르며 애교를 피우고, 제국그룹의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은상의 엄마와는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히며 깨알 같은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김성령이 연기하는 한기애는 단순히 남녀 주인공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혈안이 되는 기존 사모님들과 달리 독특한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해 나가는 중이다. 남녀 주인공과는 상관없이 본인만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심지어 주인공들의 사랑이 엇갈리면서 극의 분위기가 심각해지는 상황에서도 ‘나 홀로 웃음을 책임지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제는 김성령의 분량이 적으면 아쉬운 느낌까지 들 정도다.

여기엔 <추적자>와 <야왕> 때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달리 매사 허점투성이인 ‘허당 사모님’으로 완벽 빙의한 김성령의 연기변신의 공이 큰데,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김성령의 코믹연기는 ‘상속자들’을 보다 재미있고 유쾌하게 만들어주는 일등공신임에 분명하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남자 주인공으로부터 여자 주인공을 떼어 놓아야 할 이 사모님이 ‘상속자들’속에서는 여자 주인공의 ‘가짜 엄마’행세까지 하며 기존 클리셰를 전복시킨다는 점이다.

은상 엄마 대신 학부모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화를 대신 받은 기애는 “이쪽은 말 못할 사정이 있으니 학부모 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고 설명했으나, 학교 육성회장은 이를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에 화가 난 기애는 “어디서 어설픈 것들이. 확 청소 한 번 들어가 버릴까보다”라고 결심하며 은상의 ‘가짜 엄마’가 돼 제국고 학부모회의에 참석했다. 기애의 진짜 속내야 자신의 아들인 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겠지만, 그녀의 속마음에는 말 못하는 은상의 엄마를 대신해 전화를 받고 대신 학부모 회의에 나갈 만큼의 따뜻한 심성도 함께 자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온 몸을 비싼 의상과 귀금속으로 치장하여 다른 엄마들 기를 죽이는 모습에서는 통쾌함이 느껴졌고, 그 와중에도 시치미를 뚝 떼고 탄이의 외모를 칭찬하는 뻔뻔함에선 아들자랑에 여념이 없는 보통 엄마의 모습이 겹쳐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탄과 은상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방황의 세대, 10대다. 이들의 사랑이 험난한 가시밭길을 뚫고 결실을 맺기 위해선 그룹 내의 조력자가 필요하다. 어쩌면 기존 사모님과 다른 행보를 걷는 기애야 말로 두 사람에게 있어 우군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상속자들’에서 코믹을 담당하고 있는 기애가 앞으로 또 어떤 모습을 선보이며 시청자를 즐겁게 해줄지 무척이나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