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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약혼녀', 국가가 책임져야 합니다

책 이야기/문학,소설,수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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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국내도서>소설
저자 : 미야베 미유키 / 이영미역
출판 : 문학동네 2012.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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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라진 약혼녀. 영화 <화차>는 여기서부터 시작하지만, 이는 영화의 원작 미야베 미유키 소설 <화차>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1990년대초 일본이라는 시공간적 배경을 2010년대 대한민국으로 옮겨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정일 뿐.

 


미스터리 장르에서 ‘실종’이라는 설정은 꽤나 매력적인 소재이다. 실종 사건을 수사해나가는 도중에 여러 인물과 사건이 얽히고, 결말에 이르러서야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과정은 미스터리의 정석과도 같다. 실종에 있어 장소는 사실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집 앞이든 대형마트든 고속도로 휴게소든 크게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감정의 극을 표현해낼 수 있는 장소를 골라 집어넣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약혼녀다. 성인여자의 갑작스런 실종은 약간의 에로티시즘마저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다.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이름도 한 몫 했음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실종된 여자의 시각보다는 여자의 실종을 수사해나가는 형사의 시각으로 이 미스터리를 풀어나가고 싶었다. 영화보다 책을 선택한 이유다.

 





그녀는 왜 타인의 삶을 원했나?

 


휴직중인 형사 혼마는 어느날 먼 친척 청년으로부터 사라진 약혼녀 세키네 쇼코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쉬는 동안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혼마는 쇼코를 찾아 나선다. 그녀의 호적과 직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혼마는 쇼코가 과거 ‘개인파산’을 신청한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고, 당시 그녀를 도왔던 변호사를 만난다. 그리고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친척 청년이 결혼을 약속했던 쇼코는 사실 쇼코가 아니었다. 혼마는 수사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쇼코라는 인물에 의문점을 가지고 시작했고, 쇼코의 개인파산을 도왔던 변호사와 자신이 서로 다른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친척 청년이 찾아 달라고 부탁했던 세키네 쇼코는 사실 진짜 약혼녀의 이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떤 사정에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의 약혼녀는 어떤 시점부터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세키네 쇼코로 위장하여 살아왔던 것.

 


‘왜 그녀는 그토록 타인의 삶을 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제 실종 수사 사건은 단순한 ‘사람찾기’를 넘어 세키네 쇼코로 위장하여 살아온 또 다른 여인의 ‘삶’으로 초점이 옮겨간다.한 여성이 신용카드와 소비자 금융의 덫에 걸려 인생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경위는 이제 본격적인 미스터리로 이어지고, 작품의 주제의식 또한 서서히 베일을 벗는다.

 


‘신용불량’은 누구의 책임인가?

 

대개의 미스터리가 그렇듯, 한 가지 수수께끼가 풀리면 두 가지 난제가 주어진다. 혼마는 세키네 쇼코가 진짜 쇼코가 아니었음을 밝혀냈지만, 왜? 무엇 때문에? 라는 또 다른 의문과 마주한다. 실마리는 그녀가 사라진 시점에 있었다.

 


친척 청년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약혼녀는 세키네 쇼코가 과거 개인파산 경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뒤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을 버리고 타인의 이름을 빌려 또 다른 삶을 추구했던 그녀는 쇼코의 개인파산 과거를 모른채 쇼코의 모든 것을 도용한 것이다. 미스터리의 실마리도, 이야기의 중심축도 ‘신용불량’과 ‘개인파산’으로 이어진다.

 


‘신용불량’, 그리고 ‘개인파산’…. 작가는 상당부분의 시간을 할애하여 1990년대 초 일본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한 신용산업에 대해 비판의 날을 세운다. 주로 변호사와 혼마의 대화를 통해서다.

 


보통 사람은 빚을 갚지 못하고 신용불량으로 전락하거나 개인파산을 신청하게 되면 그 당사자를 비난한다. 특히 젊은 사람이 많은 빚을 떠안게 되면, 그 또는 그녀의 허영심이나 과소비를 문제로 지적한다. 물론 맞는 지적이다.

 


하지만 작가는 <화차>속 변호사의 입을 빌려, 갚지 못할 정도로 많은 빚을 내어준 금융회사가 문제이며 이를 제지하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도 공동 책임이 있다고 역설한다. 이른바 ‘거품신용’이라는 단어까지 써가면서 말이다.

 


그(그녀)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중반을 넘어서면서 혼마는 세키네 쇼코의 모든 것을 도용했던 그녀의 진짜 정체를 알아내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녀 역시 과거 빚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는 것, 그리고 매우 힘든 삶의 여정을 겪어 왔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어떻게 그녀가 세키네 쇼코의 모든 것을 도용할 수 있었는지는 아직 책을 읽지 않았거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미스터리’로 남겨 놓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소설 속 일본의 상황과 지금 한국 사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굳이 이 소설을 영화화한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

 


지난 2월 한국은행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말 우리나라 가계부채 총액은 912조 9000억원이라고 한다. 가계부채 총액은 가계 대출, 카드사와 할부금융사 외상판매를 합한 액수다. 가계부채 900조를 넘긴 것은 사상 처음이며, 이는 한 가구당 4560만원 가량의 빚을 지고 있는 꼴이다.

 


‘생계형 대출’이 급증하고 있다는 보도는 하루건너 한번 꼴로 지면과 방송을 장악하고, 가계부채가 금융시장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란 전문가들의 분석도 몇 년째 반복되는지 모르겠다.

 


혼마는 모든 미스터리를 해결하고 난 뒤, 어려운 사건을 풀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자본주의의 이면에서 고독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인생에 주목했다. 그녀를 잡겠다는 의지보다는 어서 빨리 그녀를 만나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렇다면 2012을 살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을까. 학자금 대출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했다는 대학생, 빚에 떠밀려 유흥업소에서 일한다는 젊은 여성, 그리고 대출금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와 아이를 죽이고 따라 죽은 가장의 이야기까지. 세키네 쇼코는 또 다른 이름과 직업을 가지고 우리 옆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판 <화차>는 나오지 않았다. 영화 역시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에 크게 기대고 있을 뿐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혼마처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세키네 쇼코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끝으로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소개한다.

 


“뱀은 허물을 벗잖아요? 그거 실은 목숨 걸고 하는 거래요. 그러니 에너지가 엄청나게 필요하겠죠. 그런데도 허물을 벗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목숨 걸고 몇 번이고 죽어라 허물을 벗다보면 언젠가 다리가 나올 거라 믿기 때문이래요. 이번에는 꼭 나오겠지, 이번에는, 하면서. (중략)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화차>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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