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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현실 속 좀비가 되지 않으려면?

책 이야기/문학,소설,수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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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 바디스
국내도서
저자 : 아이작 마리온(Issac Marion) / 박효정역
출판 : 황금가지 2011.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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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무한함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그리는데 더 익숙하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이 물질문명 사회 그 다음을 그리기 보다는 이 사회의 끝을 이야기하는데 더 많은 열정을 쏟아 붓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 세상은 핵전쟁에 의해, 생태계의 파괴에 의해, 그리고 인류가 아닌 새로운 종의 출현에 의해 종말을 맞이하곤 한다. 언제부터인가 문화 콘텐츠의 단골 소재로 활용되고 있는 ‘좀비’ 역시 절망을 그리는 데 더 익숙한 우리의 상상력이 빚어낸 결과라 볼 수 있다.

 

‘살아있는 시체’라고 풀이 할 수 있는 좀비는 차가운 몸뚱아리를 비롯해, 느릿느릿한 걸음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까지, 어느 것 하나 호감 가는 구석이 없다. 이런 좀비의 이미지는 아마도 좀비를 인류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부터 고착화되지 않았을까 싶다. 인간은 살기 위해 좀비를 죽여야만 했고, 인간의 공포심을 자극하기 위해 좀비는 더욱 더 무서워져만 갔다. 하지만 좀비물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로메로 감독의 3부작( <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 (1968), < 시체들의 새벽 > , < 죽음의 날 >)에서 좀비가 사실은 주체의식 없이 끌려 다니는 현대인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됐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우리의 상상력이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펼쳐졌는지 반성해볼 수 있다.

 

자극의 내성화와 공포의 상업화가 직접적인 원인이겠지만, 좀비가 점점 차가워지고, 냉혹해진 데에는 인간의 빈약한 상상력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작에 대한 고민은 없이, 다들 좀비를 인간의 적으로 묘사하니까, 너도나도 좀비를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동안 좀비를 소비해온 방식은 왜 인간을 물어뜯어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다들 인간을 공격하니까 그 대열에 합류하는 ‘좀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인간을 본 따 만든 좀비를 인간 스스로가 닮아가는 아이러니의 시작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작 마리온의 <웜 바디스>는 상상력에서만큼은 단연 최고의 점수를 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따뜻한 시체’라는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 아이작 마리온은 <웜 바디스>를 통해 좀비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온다. 좀비를 그저 인간의 반대편 에 선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문명사회의 종말을 함께 극복하는 ‘동지적 관계’로 재설정한 것이다. 물론 그 새로운 관계설정이 ‘왜 사랑이어야 할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어려워지지만, 그것은 마치 “왜 제5원소가 사랑이냐?”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꽤 어리석은 질문에 가깝다. 절망 속에서 사랑을 찾고, 사랑에서 희망을 보는 것은 인류의 DNA 깊숙이 새겨진 본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웜 바디스>는 ‘좀비 로맨스’라는 독특한 장르의 소설이다.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남자 좀비(R)과 여자 인간(줄리)이 묘사하는 순간, ‘아 이들이 사랑에 빠지겠 구나’하고 예측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둘로 인하여 인간과 좀비는 서로 싸우기만 하던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벗어나 함께 해골 족에 저항하는 동지적 관계로 발전해나간다. R과 줄리의 사랑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다.

 

하지만 이 책이 재미있는 건, ‘사랑의 위대함’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하는 이들이 러브스토리라기보다는 'R'이 좀비‘주제’에 의식을 가지고 감히 인간 여자를 사랑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좀비는 왜 인간을 먹어야 할까, 좀비는 왜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 것일까 고민하는 ‘R'의 모습은 좀비를 그저 괴물로밖에 묘사하지 못하는 소설 밖 인간들의 빈약한 상상력을 비웃으며 매우 흥미롭게 진행된다.

 

“역사를 망각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아우슈비츠 박물관 첫 번째 수용소 전시장을 벽에 걸려 있는 이 글귀처럼, 역사 속 대부분의 비극은 망각에서 비롯된다. 마찬가지로 이 소설 속 좀비들은 배고프면 인간 사냥을 나가고, 어린 좀비들에게는 사냥 기술을 가르쳐 주는 등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왜냐하면 그들은 망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R'은 달랐다.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수많은 좀비들 사이에서 ‘R'은 기억하려 노력했다. 그는 끊임없이 오늘을 기억했다.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의문을 가졌고, 어제와 다른 오늘을 만들기 위해 어제를 기억했다. 그래서 'R'의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달랐고, 오늘을 기억하는 ‘R’의 내일에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랑은 필연이었고, 줄리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 교훈이 비단 소설 속 죽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희망보다는 절망을 그리는 데 더 익숙한 인간의 상상력, 그리고 주체의식 없이 남들이 사는 대로 자신의 삶을 설계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사실 소설 속 좀비들의 그것과 큰 차이점이 없다.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좀비들의 그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간 사냥’을 계속하고 있으며, 수많은 비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경쟁사회 그 다음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오늘의 사회를 얼마나 더 자극적으로 표현할 것이냐 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따뜻한 시체’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독자는 아마도 우리야말로 현실 속 좀비가 아닐까 하는 섬뜩한 물음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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